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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믿지 않는 것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철기 시대
- 청동기 시대
- 신석기 시대
- 구석기 시대
- 쥐라기
- 선캄브리아기
- 원자, 전자, 양성자, 중성미자, 쿼크
- 중력
- 아뢰야식
- 미국, 홍콩, 스위스, 태국
- ADHD
- 보이지 않는 손
-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 피타고라스 정리
- 선택공리
- 배중률
이 외에도 많으나 이만 줄이겠다. 물론 이 많은 것들을 믿지 않는다면 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현대인이고, 현대란 그런 세계이다.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믿지 않는다. 단지 믿는 것처럼 연기할 뿐이다. 이 정도면 잘 살아가기에는 충분하다.
오늘 만난 사람과 고대 전쟁에서의 전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럽 축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공무원과 약사 중 무엇을 진로로 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 투표를 독려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결어긋남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지겹다. 항상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잘 살려면 어쩔 수 없다.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현대인은 믿어야만 한다. 믿음의 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은행을 믿어야 한다. 통신회사를 믿어야 한다. 교과서를 믿어야 한다. 내 과학 점수가 나빴던 건 내가 교과서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참이라고 가정하고 답안을 쓰겠는가? 내게는 점수보다 진실이 중요했다. 그러나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재야 할 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저 거울에 반사된 빛을 봤을 뿐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이후에 배웠다. 대부분의 물체는 직접 빛을 발하지 않으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광원에서 반사된 빛이라는 것을. 물질마다 흡수하는 빛과 방출하는 빛의 파장이 달라서 각기 다른 색을 낸다는 것을. 이제 내가 믿는 것은 광원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 얼굴은 빛을 발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사람 얼굴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을 만나면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혼자 이야기하기로 했다.
형광등. 형광등. 형광등. 형광등. 형광등. 태양. 해. 전등. 스탠드. 스마트폰 스크린. 광마우스 바닥에서 나오는 빨간 불. 텔레비전. 컴퓨터 파워 표시등. 자동차 전조등. 형광등. 형광등.
재미없다. 어찌되어도 상관없는 형광등 따위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기하려니 재미없다.
대부분의 물체는 직접 빛을 발하지 않으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광원에서 반사된 빛이라는 말도 사실 직접 본 적이 없다. 나는 직접 본 것은 믿지 않는데, 왜 믿었는지 모르겠다. 어중이떠중이의 말 몇 마디보다는 내 눈으로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장 이 컴퓨터가 지금 눈 앞에 보이는데, 그게 무슨 헛소리야?
21세기 사람이 비행기를 발명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다만 비행기를 믿어야 할 뿐이다.
'맏는다'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믿는다'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지금까지 뜻도 모르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을 알 수 있는 문장이 과연 있긴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