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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가입

계산 2019. 6. 5. 16:15

보험에 가입해달라는 지인의 요청을 받았다. 이전에 들었는데,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보험 설계사라는 직업은 주변 지인들을 한 명 한 명 보험에 가입시켜 나가다가 지인들이 다 떨어져 갈 때쯤 되면 그만두게 되는 직업이라고 한다. 힘든 직업이네요. 저같은 아싸는 시작하지마자 그만두게 되겠네요. 아니 하긴 뭐 저도 지인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요. 페이스북 친구가 10명이 안 되긴 하지만 링크드인 커넥션은 10명이 넘는다. 나는 보험 설계사로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 페이스북 친구와 링크드인 커넥션 중 몇 명이나 보험에 가입해줄까?

<식객>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애 엄마를 보험 설계사로 내모는 게 가장이 할 짓이야?"

허영만은 전국의 모든 보험 설계사에게 사죄해야 하는 거 아니냐? 물질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 구조는 나날이 복잡해져가고 있으며, 산업의 각 영역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 의존적 체계 하에서는 단 한 곳만 무너져도 그 충격이 일파만파로 퍼지게 되어 경제 전체를 망가뜨린다. 그 충격을 막을 수 있는 금융적 수단이 바로 보험이다. 보험이란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근대사회의 위대한 발명품이며, 위험을 감수하면서 인류가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게끔 하는 창조성의 원천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뛰는 보험 설계사들이 없다면 누가 보험에 가입하겠는가? 그들이야말로 경제의 선순환을 책임지는 산업의 역군이다. 보험 설계사를 마치 삶의 마지막 보루인 듯 묘사한 악덕 만화작가 허영만을 규탄한다.

청약(請約) <법률> 일정한 내용의 계약을 체결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방적ㆍ확정적 의사 표시. ---표준국어대사전

모바일로 보험 청약을 진행할 것을 요청받았다. 나는 청약이라는 단어도 몰랐다. 청약? 靑藥? 파란 약?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안 먹은 그거? 파란 약을 먹느냐, 빨간 약을 먹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누구나 흔히 생각해볼만한 질문이다. 내가 네오였다면 무슨 약을 먹었을까? "파란 약을 먹을걸" 하고 후회하며 매트릭스에 다시 되돌아가게 해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인류에 적대적인 인공지능에게 협조한 캐릭터도 있었는데.

인터넷 전자서명! 복잡한 보험 가입 서류는 이제 그만! 인터넷 전자서명으로 편리하게 이용하세요.

글씨를 종이에서 스마트폰 스크린 위로 옮겨놓는다고 원래 복잡한 게 안 복잡해지냐? 시발 만약 그랬다면 내가 <논리철학논고>정도는 벌써 다 읽었을 텐데. 개 시발 좆같은 책 4페이지인가 읽다가 관뒀다.

하긴 내 몸이 물리적으로 보험사에 가야 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그 점을 생각하면 인터넷 전자서명이 편리하긴 하네요.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도 좀 그러네요. 인터넷 청약 시스템 구축하려고 다들 열심히 노력하셨을 텐데. 그저 자화자찬 홍보문구의 의미가 모호하단 이유로 그런 심각한 비난을 들어야 하다니, 제가 다 죄송하네요.

청약 과정 중 보험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이 있다.

청약서 및 관련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신 후 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체크박스) 위 내용을 이해하였음.
(체크박스) 본사에서는 상기 내용에 대해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음에 동의함.
(팝업 메시지) 이거 동의 안 하면 청약 못함 ㅋ

이해? 말이 되냐? 뭘 어떻게 이해하라고? 이해가 안 가요. 진짜 이해가 안 가네요. 10번 읽어보진 않았지만 10번 읽어봐도 이해 안 갈듯. 그래도 10번 읽으면 지금보다는 좀 낫나? 사실 지금은 한 번도 안 읽었으니까요. 이 길고 복잡한 걸 언제 다 읽어? 무슨 어려운 용어가 이렇게 많아? 어휴 진짜, 이해 못 하겠어요. 이해 안 가니까 저는 보험 청약이 불가능한 거 맞죠?

내가 변호사면 이해할 수 있나? 이해하지 못하는 건 너무 끔찍해. 아 변호사 되고 싶다. 법에 대해 잘 이해하고 싶다. 역시 로스쿨에 갈 걸 그랬다. 아니면 법대라도 갈 걸 그랬다. 아니면 법학개론 교양수업이라도 들을 걸 그랬다. 아니면 <누구나 알기 쉬운 생활법률> 같은 책이라도 읽을 걸 그랬다. 아니면 법학 갤러리에서 어그로라도 끌 걸 그랬다. 아무것도 한 게 없네. 한 게 없네 진짜. 왜 살지? 죽고 싶다. 그냥 죽어야겠다.

그게 다 보험사에서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써 놓은 거죠. 그거 누가 잘 이해하고 동의하겠어요? 보험 설계사 본인은 잘 이해하고 있을까? 최소 한 학기 분량의 강의를 들어야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도데체 무슨 모순인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상기 내용을 이해하였으며 이에 동의한다. 이 황당한 작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슨 수를 써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워마드에서 들은 말이 있다.

무엇인가 안 풀릴 때면 나련을 비난하지 말고 남을 비난하면 되노. 여자는 자신감이다 이기야. 여자는 자집애가 아니라 이기. 무엇이든 나련한테는 아무 잘못 없노 이기. 예를 들자면, 자기가 영어를 잘 못하면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하지 ㅠㅠ" 하는 게 아니라 "헬조 영어교육 왜이러노 도데체 아무리 생각해봐도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없노" ---워마드

좋은 격언이다. 내 경우에 적용해보자. 내가 청약서 및 관련 서류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내 탓이 아니다. 보험 가입, 휴대전화 약정, 통장 개설 등은 현대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못 한다. 도데체 왜? 나는 이 나라의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했어. 나는 고등교육을 받았어. 그런데 어째서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을 내가 못 하는 거지? 이 나라의 교육 시스템은 완전히 실패했어. 도데체 높은 자리에 있는 걔내들은 뭘 한 거야? 도데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는 거야? 쉘든의 말이 생각난다.

This party is a scathing indictment of the American education system. ---Sheldon Cooper

보험 청약과 관련된 각종 세부사항은 로우레벨의 엄격한 법적 용어로 기술되어 있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큰 병 났을 때 돈 걱정 덜 해도 됨" 같은 편익은 하이레벨에 있다. 사람은 로우레벨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등 매우 부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원시시대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어찌됐든 그렇게 공부를 하면 로우레벨의 기호에 하이레벨의 의미를 부여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로우레벨과 하이레벨 사이를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게 된다. 본인이 로우레벨을 직접 보지 못하면 그저 전문가를 믿는 수밖에 없다.

동물의 의사표현은 연속적이다. 덜 크게 컹컹 짖으면 덜 화난 것이고, 더 크게 컹컹 짖으면 더 화난 것이다. 인간에 가까운 것이 하이레벨이라면, 동물은 하이레벨을 초월해 있다. 이에 반해 인간의 언어는 이산적이고 조합적이다. 그러한 이산적, 조합적 성질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현대 문명의 보험 청약 조항이다. 하지만, 이산적이고 조합적인 것도 적당히 해야지, 이런 극단적 구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피타고라스 정리는 이해하지만, 푸앵카레 추측(그레고리 페렐만이 증명함)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소수가 무한하다는 사실의 증명은 이해하지만, 소수 정리(소수의 분포에 대한 정리)의 증명은 이해하지 못한다. 적당히 해야 이해할 거 아냐.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 속도에 비해 문명은 너무 빨리 발전해버렸다. 내가 보험 청약 조항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내 생물학적 한계다. 노력하면 가능하다고? 하긴 나도 노력하면 100미터를 11초에 주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10초에 주파하는 사람도 있는데 뭐. 그러나 누구도 내가 100미터를 11초에 주파하지 못한다고 비난하지 못한다.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을걸? 나는 잘못이 없다.

현대 문명의 복잡성은 인간의 생물학을 아득히 초월했다. 지금은 공교육 체계를 통해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로우레벨을 잘 다루게 되는 칩을 뇌에 심던지,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하던지, 인공지능에게 사고의 대부분을 의존하던지 해야 한다. 인간 지능의 한계는 명백하다. 현 체제로는 현대 문명은 스스로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무너질 뻔 했던 대표적인 예가 2000년대 말 미국발 금융위기다.

걍 청약 안 한다고 했다. 큰 병 걸리면? 글쎄 그냥 죽어야 하나. 하긴 큰 병 걸려서 치료할 틈도 없이 그냥 바로 간 걔도 있지. 병원비가 얼마나 나왔을까? 아 차에 치여서 병원에 갈 틈도 없이 바로 간 걔도 있구나.

은행 계좌 개설할 때는 분명 이것보다 덜 복잡했던 것 같은데. 물론 그 때도 관련 조항을 잘 이해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은행 계좌가 필요했다. 나는 체크카드가 필요했다. 나는 모바일뱅킹이 필요했다. 나는 휴대전화가 필요했다. 나는 온라인에서 물건을 살 필요가 있었다. 나는 게임을 할 필요가 있었다. 필요한 건데 어떡해? 걍 아무것도 모르고 마구 마구 동의하고 서명하는 거지. 그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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