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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와 박사의 의미

계산 2019. 5. 24. 04:19

문법에는 규범문법과 기술문법이 있다. 규범문법이란 "이 언어의 문법 규칙이란 이래야 한다"며, 언어의 올바른 사용법을 규정하고 그에 어긋나는 경우를 배척하려 하는 문법이다. 기술문법이란 언어생활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배제하고, 언중들이 사용하는 그대로의 언어에서 패턴을 찾아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법이다. 언어의 문법 자체를 학술적으로 연구할 때의 문법이란 기술문법을 말한다. 순수 언어학의 연구 대상은 기술문법이다. 그러나 세대와 지역 간 소통을 돕기 위해 표준어 규정 등 규범문법이 필요할 때도 있다. 기술문법과 규범문법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문법이 규범문법이 되기도 하고, 규범문법이 기술문법이 되기도 한다. 둘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석사와 박사의 기술문법적 의미에 대해 설명해보자. 석사는 해당 분야에 대해 학부보다 더 전문적인 학위과정을  말한다. 박사는 해당 분야에 대해 석사보다 더 전문적인 학위과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석사학위 혹은 박사학위 소지자는 그 학문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다. 특정 전문성을 요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석사학위 또는 박사학위가 필수적이다. 학문 분야마다 다르나, 대한민국 이공계에서 입학에서 졸업가까지 석사는 보통 2년, 박사는 보통 5년이 걸린다. 인문사회계열의 경우 학위 취득에 걸리는 시간이 더 긴 경우가 많다. 유럽과 일본의 경우 보통 석사 2년, 박사 3년이 걸린다. 미국의 경우 학부 졸업 후 석사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할 수 있으며 5년이 걸린다.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이다. 기술문법의 정의에 의해 필연적으로 대부분의 언중들이 석사와 박사의 기술문법적 의미를 이미 알고있다. 외국의 학위 기간에 대한 내용은 잘 모를 수도 있으나, 어차피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 걸까? 신영준의 다음 글(https://jolggu.tistory.com/559)은 석사와 박사의 의미에 대한 기술문법적 기술에서 빠진 '진정한 의미'에 대해 규범문법적으로 논한다. 나는 해당 글을 비판하기 위해 본 글을 쓴다.

표준어 규정 등의 규범문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언어생활에서의 혼란을 바로잡고 언중들의 소통을 돕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누구는 같은 대상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고 표기하고, 누구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고 표기한다면, 원래 같은 것을 다른 것으로 혼동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실용적 목적 없이, "이렇게 쓰는 것이 올바르고, 저렇게 쓰는 것은 틀리기 때문에" 규범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규범은 이유 없이 인간을 옥죄는 도그마에 지나지 않는다.

신영준은 석사(碩士, master)라는 단어와 박사(博士, PhD, doctor of philosophy)라는 단어를 더 작은 단위로 분석해 석사와 박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석했다. 그러나 언어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도 같다. 단어의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여 단어가 생성된 시점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세수(洗手)라는 단어다. 원래 손(手)을 씻는다(洗)는 뜻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변하여 얼굴을 씻는다는 뜻이 되었다. 이 경우 단어를 더 작은 구성요소로 분해해서 알게 된 뜻은 우리가 잘 알고 사용하고 있는 세수라는 단어의 기술문법적 뜻과는 전혀 관계없다. 언중들이 이해하는 세수의 의미를 무시하고,  "세수의 진정한 의미는 손을 씻는다는 뜻이다. 앞으로 세수를 할 때는 얼굴보다는 손을 주의깊게 씻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유 없는 도그마에 지나지 않으며,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구성요소의 의미와 전체의 의미가 다른 또 하나의 예로 모순(矛盾)이라는 단어가 있다. 모(矛)는 창을 뜻하고, 순(盾)은 방패를 뜻한다.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모순이라는 단어의 뜻은 창과 방패와는 관련이 없다. 또 다른 예로, 전화기(電話機)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각 한자를 살펴봐도 카메라나 알람시계라는 뜻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를 들어 전화기에 카메라를 다는 것이 전화기의 '진정한 의미'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한다면 아무런 유익도 없다.

시대에 따른 단어의 의미 변천을 연구하거나, 고대사를 연구하는 등, 구성 요소로의 분석이 의미 있게 쓰이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현대의 언중들에게 해당 단어의 '원래의 의미' 혹은 '진정한 의미'를 강요할 수는 없다.

신영준은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논했다. 그러나 사전은 정의내리지 않는다. 다만 설명할 뿐이다. 다만 이는 모든 사전에 대해 일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술문법적 관점에서 편찬된 사전이 있고, 규범문법적 관점에서 편찬된 사전이 있다. 예를 들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영어의 사전에 비해 다소 규범문법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연어 사전의 경우, 자주 사용되며 사람들이 혼동하지 않는 표제어에 대한 서술은 대개 기술문법적이다. (심지어 사전 편찬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기술문법적이어야만 한다. 단어의 의미(또는 발화의 의미)는 화자의 의도와 화용 맥락에 크게 의존한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전의 짧은 서술이 무수히 많은 가능한 맥락을 모두 포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사용법을 정밀히 규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어 화자가 자신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잘 사용하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사전 편찬자가 모어 화자의 단어 사용법을 찾아봐야 한다. 자신의 의도를 남에게 잘 전달하기를 원한다면 단어 사용법을 사전에서 찾기보단 다른 방식으로 명확히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빠르다. 사전을 외우고 다니는 모어 화자는 없다. 내가 잘 몰라서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면 남도 마찬가지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를 몇 가지 살펴보자.

박사1(博士)
「1」 『교육』 대학원의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규정된 절차를 밟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학위. 또는 그 학위를 딴 사람. 대학원의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대학원 위원회가 실시하는 외국어 시험과 종합 시험에 합격한 다음,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해야 학위를 준다.
교육학 박사.
박사 학위를 따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다.
「2」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 청년은 컴퓨터 박사이다.
그가 식물 이름을 줄줄 외는 걸 보니, 이제 식물학 박사가 다 되었다.

박사^과정(博士課程)
『교육』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원의 교과 과정.

학위(學位)
『교육』 어떤 부문의 학문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공부하여 일정한 수준에 오른 사람에게 대학에서 주는 자격. 학사, 석사, 박사 따위가 있다.
학위를 따다.
학위를 받다.
학위를 수여하다.

별로 특별한 내용은 없다. 사전의 권위에 의존할 계획이라면 신영준이 말한 내용을 이끌어내기는 불가능하다.

"이름은 우리 인생의 추상화이다. 그만큼 본질이 축약되어서 담겨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의 본질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여 정확한 뜻도 사실 모르면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라고 신영준은 말했다. 이름을 기호(기표, 시니피앙)와 그 의미(기의, 시니피에)로 나누어서 본다면, 기의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의 추상화이다. 그러나 기호 자체에는 본질이 담겨있지 않다. 기호와 의미의 관계는 임의적이며, 본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 신영준이 말하는 본질이란 고등 학위의 의미에 대한 목적없는 사변적 탐구의 결과일 뿐이다. 신영준은 그저 석사, 박사 학위자에게 일정 수준을 요구하고 있고, 그 수준이란 자의적이며, 피라미드 등 추상적이고 공허한 비유로 표현되어 있어서 가늠하기 어렵다. 삼성의 석사 졸업 신입사원에게 기대하는 수준이란 삼성이라는 회사에서 기대하는 수준일 뿐, 석사 학위자 전체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언어를 비롯한 의사소통 체계의 핵심은 구성원간의 공유이다. 나 홀로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해도 아무 소용없다. 기호 자체와 그 의미의 관계는 서로 공유될 때 비로소 소통을 위한 도구가 된다. 나 홀로 단어의 뜻을 임의로 정의하고 그 뜻을 진정한 뜻이라고 치켜세우며 남들도 같은 뜻을 따르기를 종용하는 것은 언어의 사회성을 무시한 독단이자 오만이다. 모두가 SI 체계에서 정한 미터법을 따른다. 그 누구도 자기 손가락 길이를 새 길이의 단위로 정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미 널리 쓰이는 체계 앞에서는 겸허할 필요가 있다.

석사, 박사과정을 생각하고 있거나 실제로 학위과정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될만한 글로 다음 글을 권한다. http://gradschoolstory.net/yoonsup/2-2/ 이 글 또한 석사와 박사의 (실질적이자 맥락 의존적인, 독단적이지 않은) 의미에 대한 글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언어학적 관점에서 신영준의 글 <석사와 박사의 진정한 의미>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게 정말 잘 비판한 걸까? 그저 형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닐까? 핵심을 비껴나간 채, 주변부를 맴돌며 지엽적인 부분을 파고들기만 한 것은 아닐까?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에는 남자 주인공 '나'와 그의 여자친구 클로이가 열쇠를 두고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클로이: 나한테는 열쇠가 없어. 그럼 네가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을 잠가버린 거잖아.

나: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을 잠근 게 아냐. 네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문을 닫은 거야. 내가 열쇠를 두었떤 곳에 열쇠가 없었으니까.

클로이: 정말 멍청한 짓이네. 나도 열쇠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밖에 갇혀버렸네. 정말 고마워.

'나'와 클로이의 다툼의 핵심에 있는 것은 열쇠가 아니다. 핵심은, 클로이의 사랑이 끝났고, 따라서 둘의 사랑이 끝났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제 관계에서 느끼는 것은 짜증뿐이라는 것. 대화하면 할수록 지칠 뿐이라는 것.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차이는 손가락 길이, 태아 시절 영향받은 호르몬 등, 생물학적 요인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나'와 클로이의 경우도 호르몬의 작용 등 생물학적 요인으로 환원가능한 걸까? 내가 신영준의 글을 읽고 느낀 왠지 모를 불쾌함도, 생물학 수준으로 환원가능할까? 생물학은 너무 많이 내려간 걸지도 모른다. 그냥 내게 익숙한 환경이 무엇인지 정도로 환원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대학원생 중에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다. 맨날 딴짓하고 논다. 세미나에서는 항상 스마트폰을 쳐다본다. 진지한 자세로 학문에 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다들 학문에 다소 관심이 있고, 자기 할 일을 어느 정도 잘 해내는 것 같긴 하다.

우리 아빠도 그랬다. 종종 공허한 추상적 언어로 이야기하고, 삶의 깨달음에 대해 말했다. 깨달음? 실험과 관찰을 통해 얻은 결과도 아니고, 엄밀한 증명을 통해 얻은 결과도 아닌데, 오류투성이인 인간 뇌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왜 본인의 사고 과정에 대한 의심은 하지 않는 걸까? 앎과 모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일이 즐겁다고 했다. 꼰대같았다. 그게 싫었던 걸까? 나는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하는 게 싫다. 대조적으로, 신영준은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대충 대충 하는 걸 싫어하겠지. 대충 대충 살던 석사졸 삼성 신입사원들이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이런 글을 쓴 걸까?

"하지만 그 의도와 걸맞게 사람들은 자신이 가려는 길에 대하여 과연 깊게 생각해봤을까? 과연 한국에서 석사/박사 과정에 있거나 관심 있는 친구들 중에 과연 석사와 박사의 뜻을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는 친구가 몇 명이나 될까?(개인적으로 강연에서 300명 친구들에게 물었을 때는 한 명도 없었다.)"

일종의 선민의식 또는 깨시민의식, 나는 남들과 달리 깨어 있다, 라는 식의 태도가 느껴진다. 이런 태도가 불쾌했던 걸까? 300명에게 질문했을 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깊게 생각해본다는 건 뭘 말하는 걸까? 자신이 택한 길에 믿음과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내 추측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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