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나는 사탕수수 농장주다. 우리 농장에서는 노예를 부려서 사탕수수를 재배한다. 사탕수수에서 당밀을 분리해 설탕을 만든다. 그렇게 만든 설탕으로 케이크도 만들고 쿠키도 만들고 콜라도 만들고 커피믹스도 만들고 부대찌개도 만든다. 하여튼 단 건 뭐든 설탕이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진짜 케이크나 쿠키 만드는 거 보면 설탕 무지무지 들어감. 너는 상상도 못할거다. 제과 실습 해봤냐? 설탕을 아주 쏟아붙는다. 그 때 실습 선생님이 하는 말
그렇게 넣어도 별로 안달아요.
아주 팍팍 넣어야 한다. 너희들이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먹던 쿠키, 앞으로도 아무 생각 없이 처먹을 수 있을까? 그 수많은 설탕이 다 네 피에 녹아들어 혈당 수치를 올릴텐데?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아는 걸 모르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과 죽음의 관계도 이와 같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이는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죽음과 앎은 비가역적이다. 무엇인가를 배울 때는 신중할 것. 알기 전의 그 시절로 절대 되돌아갈 수 없으니. 하긴 너네들은 머리 나빠서 되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나는 한번 안 건 절대 까먹지 않는다. 너무 내 기준으로만 생각했네. 너희들은 참 좋겠다. 나는 무엇이든 배울 때마다 생각해. 이 기억이 내 뇌 속에 박혀서, 영원히 나를 괴롭히진 않을지. 항상 그런 두려움에 떨며, 새로움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어. 역시 멍청하면 행복한 법이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하게 태어난 걸까. 지적 장애인으로 태어날걸. 내 다리가 백만불짜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리에 대한 자긍심만으로도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하긴 그러면 우리 엄마가 불행했으려나. 반대로 다리가 불편한데 머리가 멀쩡하다면...... 조제처럼? 아니 조제가 머리가 멀쩡하긴 했었나?
모토카노: 나는 네 다리가 부러워. 그 다리로 동정(同情)을 사서 내 남자를 빼앗아갔지. 찰싹(철썩)!
이마카노: 그러면 너도 그 다리 잘라버리면 되겠네. 찰싹(철썩)!
다리가 불편하니까 그것도 가능했지. 머리가 불편했다면?
모토카노: 나는 네 머리가 부러워. 그 머리로 동정을 사서 내 남자를 빼앗아갔지. 퍽! (머리를 때린다)
이마카노: 그러면 너도 그 머리 잘라버리면 되겠네. 퍽! (머리를 때린다)
머리가 불편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야리토리네요.
내가 조제라면 약사가 되어서 약을 조제할 것이다. 약은 조제하는 것인가 제조하는 것인가. 제조는 공장에서, 조제는 약국에서 일어나는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되나? 조제가 약사가 되어 약을 조제한다는 이야기가 아주 허무맹랑한 건 아니다. 실제로, David와 Denis는 dentist가 될 확률이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높다고 한다. 슈뢰더는 신발을 만들 확률이 높고, 다나카는 밭 가운데 살 확률이 높다.
내 성명은 노예진이다. 성이 노, 명은 예진이다. 할아버지한테 물어봤다. 이 성명의 뜻이 뭐죠?
노예 주인이라는 뜻이란다.
내가 노예 사탕수수 농장주가 된 원인의 중심에 내 성명이 있다. 내 성명이 손흥민이었다면 축구선수가 되었을 텐데. 어차피 태어나는 순간에 삶의 대부분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하필 사탕수수 농장주가 된 건(件)? 목화 농장주가 될 수도 있었다. 그건(件) 내 능동적 선택이었나? 어릴 때 슈가(걸그룹)를 좋아하긴 했다. 그 중 특히 아유미(歩み)가 기억난다. 물론 문익점 전기도 감명깊게 읽었다. 요즘도 종종 일어나는 것 같네요. 깻잎을 짐 속에 숨기고 입국심사대와 세관을 무사히 통과한 경험이 없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솔직히 일에 회의를 느낀다. 너 같으면 이 일이 재밌겠냐? 맨날 게으른 노예들 채찍으로 때려가며 억지로 일 시켜야 한다. 땡볕에서 채찍질하려면 참 힘들다. 죄책감? 하긴 처음에는 죄책감이 좀 들긴 했다. 그래서 괴로웠다. 그러나 결국 익숙해졌고, 지금은 거의 아무렇지도 않다. 이 일 처음 시작했을때가 아직도 생각난다.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건 알겠어요. 저희가 일하지 않으면 쿠키도, 케이크도, 콜라도, 커피믹스도, 부대찌개도 없겠죠. 하지만 꼭 제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쿠키와 케이크와 콜라와 커피믹스와 부대찌개를 만들고, 저는 먹기만 하면 되잖아요. 저 너무 괴로워요. 일 하기 싫어요. 일 그만두고 싶어요. 일 안 하고 먹기만 하고 싶어요.
백수가 말이 많군. 시간이 해결해줄 거네.
역시 어른들 말씀은 틀림이 없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내가 괴로웠던 원인은 그저 새로운 일에 대한 당혹스러움이었을 뿐이었다. 노예의 인권?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그만두고 싶다고 어른들한테 하소연하지 않고, 일에 잘 적응하는 척 하면서 어른들 모르게 노예들의 반란을 돕고 노예 인권운동에 앞장섰을 것이다. 나는 별로 그런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다.
달걀 농장 주인이 암탉한테 죄책감을 느낄까? 벼 농장 주인이 벼에게 죄책감을 느낄까? 노예 사탕수수 농장 주인이 사탕수수에게 죄책감을 느낄까? 노예나 사탕수수나, 지금의 내가 볼 때는 그게 그거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관찰하는 노예들의 삶은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다. 언제나 쟤내들이 자살할까 두렵다. 그게 다 생산성인데. 암탉과 벼와 사탕수수가 자살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노예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 물론 노예에게는 건(gun)이 없긴 하다. 총기를 이용한 자살은 치사율이 80퍼센트에 이른다. 자살 방법 중 가장 성공률이 높다. 그래도 다른 방법도 충분히 많을 텐데.
나는 두려웠고, 방법을 하나 생각해냈다.
혹시라도 자살하면, 나도 너희들을 따라 저세상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너희들을 더 끔찍하게 대해주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It was an effective measure.
'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책의 내용은 모두 허구입니다 (0) | 2019.05.19 |
---|---|
20190510 (0) | 2019.05.19 |
死にたい (0) | 2019.05.15 |
I decided to push you out of my lab (0) | 2019.05.09 |
아빠의 피 (0) | 2019.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