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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

계산 2019. 4. 25. 19:33

나는 자살자다. 대표자는 대표하는 사람이다. 감시자는 감시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살자다.

연기자는 연기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예술하는 사람이다. 정치가는 정치하는 사람이다. 과학자는 과학하는 사람이다. 장례지도사는 장례를 지도하는 사람이다. 배우자는 무엇이든 배우자는 사람이다. 소방관은 소방용 급수관을 정비하는 사람이다. 요리사는 여자를 요리하는 사람이다. 요리사람은 여자사람을 요리하는 사람이다. 여자 요리사는 여자를 요리하는 여자사람이다. 여자 요리사람은 여자사람을 요리하는 여자사람이다. 여자사람 요리사람은 여자사람을 요리하는 여자사람사람이다.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는 각각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과 바이올리노를 잘 치는 사람이다. 자살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살자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사람들을 자살했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동물, 식물, 진핵생물 등, 많은 유정물 및 무정물들을 자살했다. 흔히 자살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고 한다. 거짓이다. 나는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자살했다.

나는 오늘 사마귀를 자살했다. 내가 걷고 있을 때였다. 발 밑에 사마귀가 있었다. 사마귀는 밟혀 죽었다. 사마귀는 자살했다. 내가 걸을 때 하필 자기 스스로 내 발 밑으로 들어왔으니 자살이다. 그 때 거기 있는다는 선택은 분명 사마귀 본인(本蟲)의 의지였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발 및 사마귀는 죽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서 내게 고통을 준다. 언제나 절뚝거리며 걷게 된다. 왜 하필 발 밑일까? 사마귀를 자살하는 것이 내게는 치료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지나가던 사람을 자살했다. 차도를 지나가던 사람이었다. 내가 차를 몰 때 그는 내 차 앞에 서있었고, 치여서 죽었다. 그 때 거기 서있었던 건 걔의 의지였다. 스스로 죽었다. 자살했다. 내가 그를 자살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나는 나를 괴롭히던 그 덩치 큰 사람을 자살했다. 내가 칼을 들고 학교로 온 날 그도 학교에 왔다. 그는 분명 본인의 의지로 학교에 왔다. 그 날 그가 학교에 없었더라면 자살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200년 후의 일이다. 나는 번역자와 통역자들을 자살하려고 한다. 참고로 번역자는 번역하는 사람, 통역자는 통역하는 사람이다. 번역자 또는 통역자가 된 건 그들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살이다. 나는 그 때를 위해 인공지능과 패턴인식을 열공중이다.

어제의 일이다. 나는 스마트폰을 자살했다. 주머니에서 흘러 떨어진 스마트폰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났다. 자기 스스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 자살이다.

지난주의 일이다. 나는 모니터를 자살했다. 로딩이 하도 안 끝나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모니터를 볼펜으로 찔러 산산조각냈다. 로딩을 끝내지 않은 것은 모니터 본인(本機)의 의지였다. 아 잘 생각해보니까 컴퓨터 본체의 의지구나. 정정하겠다. 나는 본체는 모니터를 타살했다. 로딩을 끝내지 않은 것은 본체의 의지였다.

나는 자살자다. 자살하는 사람이다. 거꾸로 해도 자살자, 바로 해도 자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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