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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가 잘 안 되어서 내과에 방문했다. 약을 받았다. 집에 와서 무슨 약인지 검색해보니 정신과 약이었다. 소화불량에 정신과 약? 돌팔이 의사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좀 더 검색을 해보니 스트레스성 소화불량에는 정신과 약이 잘 듣는다고 한다. 나는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소화불량은 사라졌다.
소화불량이 사라지니 밥을 점점 많이 먹게 되었다. 예전에는 라면을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식당에 가면 1인분이 너무 많았는데, 이제는 라면 2개도 별로 배부르지 않고 음식점 1인분도 별로 많지 않다. 그렇게 처먹다보니 살이 쪘다.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내 BMI는 점점 올라가기만 했다. 전에 입던 옷이 안 맞게 되어서 옷을 새로 사느라 돈을 써야 했다. 살을 좀 빼야 하나? 먹는 걸 줄여야 하나?
먹는 걸 줄일 수는 없다. 먹는 것만이 삶의 즐거움인데, (나는 먹기 위해 산다) 어떻게 줄이겠는가? 그렇다면 운동을 해야 하나? 어찌됐든 섭취하는 칼로리보다 소모하는 칼로리가 많으면 살은 빠진다. 하지만 운통은 고통, 고통, 고통이다. 근육과 심폐기관을 혹사시키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다이어트를 하지도, 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처먹을 뿐이었다. 그렇게 살은 계속 쪄가기만 했다. 하지만 살이 좀 쪄도 뭐 어떤가? 내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고, 패션모델을 할 것도 아닌데 (사실 살이 쪄도 패션모델을 할 수 있다, 드물지만) 유흥업 접대부로 일할 것도 아니고, 경마 기수를 할 것도 아닌데.
살이 찌면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아직 젊다. 건강에 신경쓰지는 않아도 되는 나이다. 미래의 걱정을 미리 앞당겨서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
그렇게 나는 먹고 먹고 또 먹고를 반복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가 먹고 먹고 또 먹고를 반복한다. 먹는 걸 갑자기 중단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단식투쟁 하는 사람도 결국은 먹는 것을 재개한다. 먹는 걸 중단하는 사람은 죽는 사람 뿐이다. 비록 내가 먹고 먹고 또 먹고를 반복하지만, 나 역시 다른이들과 다르지 않다.
하여튼 내 체중은 어느 순간 100kg를 넘어섰고, 200kg, 300kg, 400kg, 500kg, 600kg, 700kg, 800kg, ...
이렇게 팍팍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체중이 증가함에 따라 기초대사량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즉, 먹는 양이 일정하다고 할 때, 체중은 어느 특정 점으로 수렴하지, 무한히 발산하지는 않는다. 내 체중도 특정 점 이상으로는 오르지 않았다.
...
"한심하군, 그렇게 돼지같이 살만 뒤룩뒤룩 쪄서는"
내 내면의 목소리가 말한다.
"굳이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이유도 이렇게 돼지같이 살찐 자신의 몸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잖아?"
내면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내면의 목소리는 하나뿐만이 아니다. 당연하다. 내면의 목소리가 저거 하나였으면 나는 이미 살을 뺐을 것이다. 원래 내면의 목소리는 여러 개고, 다수결의 결과로 나는 살이 찌게 된 것이다.
"어서 살을 읍읍... 읍읍... 읍읍..."
내면의 목소리는 그 이후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
사실 방법이 하나 있다. 식단 조절도 안 하고, 운동도 안 하면서 살을 뺄 수 있는 방법이. 소화불량 약을 끊으면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소화불량이 생기고 밥을 적게 먹게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일종의 식단 조절일지 모르지만, 고통을 동반하는 식단 조절법은 아니다.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헛소리! 소화불량은 정말 괴롭다.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나는 다시는 그런 괴로움을 맛보기 싫어. 이제 약 때문에 겨우 괜찮아졌단 말이야! 나는 약을 끊을 수 없다.
...
이렇게 살이 쪄서는 남자친구도 사귈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똑같이 뚱뚱한 처지에 있는 남자를 만나면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뭐 괜찮다. 남자친구가 꼭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정 절박하면 아이돌과 유사 연애라도 하면 된다.
...
몸을 씻을 때면 거울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거울에 비친 내 추한 몸을 보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별로 큰 문제는 아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거울 보기를 피할 수 있다. 보이지 않으면 문제없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그냥 살을 빼는게 낫지 않나?
먹는 양을 줄이고 운동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