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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분하다.
따분할 때면 사람을 죽인다.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행위를 통해 따분함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물론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고, 사람을 죽이는 게임을 한다. 게임이라는 자극적인 행위를 통해 따분함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게임을 하며 사람을 많이 죽였다. 몇천명인지 몇만명인지 셀 수도 없다. 너무 많이 해서 감각이 둔해진 걸까, 무뎌진 걸까, 날을 간 지 오래되어 손을 베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낡은 과일 깎는 칼처럼, 아무리 잡고 휘두르며 사람을 찔러도 아무것도 찌른 것 같지 않고, 나는 따분한 그대로다.
어쩌면 죽이니까 따분한 것일지 모른다. 죽임이라는 죄에 대한 벌로 따분함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이지 말고 대신 살리면 될지 모른다. 고귀한 생명을 이 손으로 살렸다는 그 성취, 고양, 환희, 나는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일지 모른다.
무엇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의사가 되는 것? 내 실력으로는 무리무리, 평범한 성적의 내가 의학부에 진학할 수 있을리 없잖아! 그렇다면 깨끗한 물을 시민들에게 공급해 도시 위생의 기반을 닦는 배관공? (의사보다는 배관공이 더 많은 생명을 구한다) 무리무리, 나님은 그런 힘든일은 하기 싫다고
사실 직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없다. 그냥 요양원 봉사활동이나 하기로 했다. 요양원의 존재목적은 생명을 살리기보다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 같지만, 살리는거나 연장하는거나 어차피 그게 그거다. 5년 연장인지 50년 연장인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생명은 똑같이 고귀하므로 반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양원 봉사활동은 정말이지 따분했다. 어차피 봉사활동 온 사람한테 힘든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 그냥 걸레질이나 빗자루질을 좀 할 뿐이다. 정말 힘든 일은 노련한 전문인력 몫이다. 노인들 밥을 먹여주거나 목욕을 시켜주거나 기저귀를 가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일텐데, 그런 일을 했다면 따분할 틈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따분함은 축복이다. 따분함이란 아무런 고통이 없다는 증거다.
따분해서 자살하고 싶다. 고통 없는 상태에서 죽는 것 역시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