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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의 결심을 지켜내고 금연에 성공했다. 술과 담배와 스타크래프트는 끊는 것이 아니라 평생 참는 거라는 속설이 있긴 하지만 올해 이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으니 이정도면 충분히 성공이라고 불러도 될법하다. (간접흡연을 한 적이 분명 있지만 이는 내 잘못이 아니라 하겠다.) 해냈다. 해냈다. 해냈다. 내가 해냈다. 굳건한 의지로 결심을 지켜냈다. 한때는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 느꼈지만 이는 명백한 거짓이었다. 나는 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정말 이 정도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취감이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거짓말이다. 자기기만이다. 사실은 전혀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작 금연에 성공한 것 가지고? 애초부터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도 수두룩한데, 겨우 담배 좀 끊었다고 해서 성취감이 느껴질 리가 없다. 이전에는 담배를 성공적으로 끊은 사람들에 대한 질투에 시달렸다면, 이제는 담배를 애초부터 피지 않은 사람에 대한 질투에 시달린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 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걸까. 청소년기의 철없는 호기심? 나 역시 담배를 피우는 한 명의 어른이 되고 싶다는 역설적 미성숙함? 규율 깨기를 통한 카타르시스? 흡연자에 대한 또래 그룹에서의 인정? 어느 이유든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거짓말이다. 자기기만이다. 애초부터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평생 한 흡연이라곤 몇 번 안 되는 간접흡연 뿐이었다. 청소년기의 철없던 나를 자책할 이유가 없고, 비흡연자에 대한 질투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올해 초 금연을 결심한 일도 사실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하고 있는 걸 굳이 결심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성취감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노력은 정말 힘들기 때문에 노력 없이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금연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노력 없이 그 목표를 달성한 지금, 나는 아무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원래 성취감이란 그렇게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닌가? 거짓 목표 달성은 공허함만 남길 뿐인가?
고대 문헌을 조사한바 성취감이란 (1)내가 하지 못했던 것을 해냈을 때 또는 (2)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낼 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내 경우 (1)은 해당사항이 없을지 몰라도 (2)는 맞아떨어진다. 흡연이나 하고 다니는 한심한 쓰레기들이 정말 너무 많으며 나는 그들보다 분명 낫다. 그러나 내 처지를 그들과 비교해봐도 나는 아무런 안도감도 얻지 못한다. 취업이 안 되어 신변을 비관하는 취업준비생 및 취업실패생이 자신의 대학 동기들도 모두 취업이 안 되는 것을 보고 안도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교도소 수감자를 보고 안도감을 느끼지는 않는 것과 비슷한 걸까? 흡연자와 수감자는 정말 노답이기에 그런 이들과는 비교 자체가 모욕인가?
아니면 사실 흡연이란 좋은 것이고 흡연자들은 실패자가 아닌 삶을 즐길 줄 아는 자들이기에 나는 오히려 흡연을 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걸까? 담배갑에 쓰인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는 문구는 그저 소비자를 우롱할 뿐인 걸까? 사실관계의 판단이란 어려운 문제다. 나는 의학 전문가도 아니고 담배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내게 금연은 정말 너무 쉬웠다. 노력을 해야 성취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워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뭐가 있을까? 토익 700 달성? 그러나 재야 엘리트 영어고수인 내게 토익 700은 너무 쉬운 목표다. 비록 기간만료되었지만 나는 애저녁에 이미 토익 800을 달성했다. (여기서 애저녁은 말 그대로 저녁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래 전이라는 뜻이다. 행간을 읽어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토익 900은? 토익 900 따서 무엇하겠는가? 그런 점수보다는 실전(實戰, 실제의 싸움 또는 전투) 영어능력이 중요하다. 토익 900점 같은 껍데기가 있어봤자 공허할 뿐이다. 원래 삶이란 실전이다. (이 부분에서 여우의 신 포도를 떠올리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재야 엘리트 영어고수인 점을 고려하면 설득력 없는 해석이다.)
금연이 너무 쉬웠다면 금주는 어떨까? 그러나 나는 술 역시 안 마신다. 금연의 경우처럼 허무한 성취감만을 낳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