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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등학교

계산 2020. 7. 28. 11:33

사정상 다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별로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삶이라고 하지 않던가.

 

일진들은 여전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는 언제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나보다 사회 경험이 한참 부족한 하룻강아지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그러나 비록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더라도 상황에 맞게 처신하는 것이 최선이다. 나이가 곧 권력인 것은 초등학생 때까지이다. 비록 나보다 나이는 적지만 그들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나는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도록 언제나 눈을 내리깔았다. 그들이 불의를 행할 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라고 훈계하며 그들에게 의(義)를 설하고 싶었으나 어른 공경의 예(禮)를 알지 못하는 그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그들의 비행을 묵인했다.

 

특히 체육 시간은 그들의 독무대였다. 나는 그들과 경쟁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 동안 주중이면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만 쳐다봤고, 주말이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만 쳐다봤던 나는 안구건조증, 척추측만증, 거북목 증후군, 역류성 식도염, 스트레스성 위염, 좌골신경통, 족저근막염, 퇴행성 관절염 등의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인바디 검사를 했을 때는 언제나 근육량 부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나는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찼다. 체육 시간 다음날이면 언제나 근육통에 시달렸다.

 

문학 시간이었다. 수업 내용은 일제시대의 스페인 번역 문학이었다. 스페인어에서 일본어를 거쳐 한국어로 중역된 그 소설은 현행 한글 맞춤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있었다. 고유명사를 음차하는데 쓰이는 내가 알지 못하던 수많은 한자들로 가득했다. 교과서의 글씨는 6포인트 정도로 너무 작았고 인쇄 품질도 좋지 않았다. 글자들이 뭉개져서 보였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각자 읽어볼 것을 지시했다. 나는 읽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고등학생의 문학 수업이란 말인가? 일견 수업의 수준은 내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이미 성공적으로 졸업한 내 지적 능력으로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텐데! 내가 고등학생 수준 미만일 리가 없는데! 눈 앞의 상황을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지금 이 과목이 다른 무엇도 아닌 문학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난해한 이론들을 공부해왔다. 나비에-스톡스 방정식, 양-밀스 질량 간극 가설, 리만 가설, P vs NP, 푸앵카레 추측 등의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하며 해를 모색해왔다. 그 과정을 거치며 내 지적 능력은 일취월장했다. 특히 하찮은 문돌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문돌이들이란 정말 멍청하다. 그 빡대가리들은 고차원적 사고를 할 능력이 없다.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분명 어린애 수준 장난일 텐데.

 

"자 다 읽었지? 그럼 거기 구석자리 여학생이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무슨 심정으로 풍차를 향해 돌진한 건지 대답해봐."

 

교사의 질문에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고생이 대답했다. 눈물이 하릴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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