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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이 벌써 절반쯤 지난 이 시점에서 올해를 돌아보면 분명 나는 많은 것들을 했다.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하루에 8시간씩 꼬박꼬박 일했고, 책도 2권이나 읽었고, 운동도 2주일에 1회, 1회에 30분씩이나 했다. 그동안 미뤄왔던 컴퓨터 포멧도 했고 드롭박스 정리도 끝냈다. 스팀에서 풍선타워디펜스6(Baloons TD6) 플레이타임 20시간, 스타듀밸리 플레이타임 30시간도 달성했다. 분명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이렇게 많은 일들을 했는데 왜 한 게 없는 것 같지? 왜 하루하루 시간만 낭비하며 살아온 것 같지?
비유하자면 마치 노예 농장주가 된 기분이다. 농장주는 나고 노예 역시 나다. 노예에게 하루 19시간의 중노동을 시킨 후 농장주는 말한다. "하루종일 한 일이 겨우 이만큼이야? 게으른 녀석 같으니! 일한 자에게만 밥을 먹을 권리가 있어! 너는 오늘 저녁은 없어!" 어떻게 그런 뻔뻔한 소리를! 노예는 무려 19시간이나 힘들게 일했는데! 사실 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스스로의 뻔뻔함을 느끼고 있겠지. 농장 생산성을 향한 탐욕의 질주가 너를 양심의 소리로부터 둔감하게 만들었을 뿐이야. 열심히 일한 노예에게는 28박 29일의 하와이 휴가가 필요해. 코로나 때문에 요즘은 그것도 못하겠군.
무엇이 나를 노예이자 노예 농장주로 만들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가? 성공 따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 텐데.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성공에 가치를 두고 살아간다. 나는 그들이 창조해낸 교육과정을 거치며 세뇌되었다. PTSD를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없듯이, 나 역시 장기간에 걸친 사회적 가치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엄마와 아빠를 죽였을 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효를 중요한 가치로 숭상했기 때문일까? 문화, 사상, 집단무의식의 힘 앞에서 한 개인의 정신력으로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일까? 내 행동을 정당화하는 정교한 논리를 짜내고 또 짜냈지만 존속살해라는 죄목 앞에서는 그 무엇도 소용없었다. 내 행동이 올바르다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가슴이 따라주지 않았다.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내가 그들을 죽인 이유는 분명 간단명쾌했다. 그들이 나를 낳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낳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런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그들도 그들의 부모가 그들을 낳았기 때문에 살다 보니 나를 낳게 되었을 뿐 진정한 잘못은 그들의 부모에게 있을지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들의 부모인 엄마의 엄마와 엄마의 아빠와 아빠의 엄마와 아빠의 아빠를 모두 죽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의 엄마의 엄마와 엄마의 엄마의 아빠와 엄마의 아빠의 엄마와 엄마의 아빠의 아빠와 아빠의 엄마의 엄마와 아빠의 엄마의 아빠와 아빠의 아빠의 엄마와 아빠의 아빠의 아빠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내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학교에서 나눠줬던 교과서는 성공한 이들로 가득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 남을 도운 사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사람, 문자체계를 만든 사람 등등. 물론 그냥 별 거 없이 대충 살다 죽은 사람도 종종 나온다. 예를 들면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병 걸려 죽은 소녀가 그렇다. 너는 노벨상도 못 탔고, 남을 돕지도 못했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지도 못했고, 문자체계도 만들지 못했고, 심지어 네가 만난 소년에게 무언가를 해준 것도 아니야. 네 삶은 정말 별 거 없었구나. 그러나 안심해. 이제 죽었으니 더 이상 인류에 공헌하기 위해 아둥바둥할 필요 없단다.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50%는 그렇게 아둥바둥하여 성공하였으나 나머지 50%는 실패하였단다.
이럴 수가!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이렇게 편파적일 수가! 실제로는 그렇게 아둥바둥하여 성공한 이들은 0.0000000000000000000000000001% 에 불과한데! 0.0000000000000000000000000001%를 50%인 것처럼 속여먹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이 무슨 대국민 사기극이란 말인가! 내 전신 초상화를 그린다고 하자. 내 몸의 절반은 직경 30cm 가량의 아주 굵은 털 한 올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절반은 내 얼굴, 몸통, 팔다리, 뇌, 허파, 사랑니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에 불과한 눈썹 한 가닥이 내 절반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이런 걸 정상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천만에! 이딴 초상화를 그린 건 나에 대한 모욕이야. 너는 어디가서 그림으로 먹고 살 생각은 접어라. 이 나라의 문화예술계는 내가 꽉 잡고 있으니. (물론 그냥 기분 나빠서 해본 블러핑이다. 나에게 그런 인맥은 없다.)
"6개월에 책 2권 읽은 게 읽은거냐? 책은 한달에 10권은 읽어야지!" "2주일에 30분 운동한게 운동이냐? 운동은 매일 1시간 30분씩 해야지!" "주 75시간 미만 일한 사람은 열심히 일했다고 하지 마라" "나는 풍타디6(BTD6) 플탐 1500시간차란다. 귀엽네" "나는 스타듀밸리 플탐 1200시간차란다. 귀엽네." 라며 나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래, 책을 한달에 10권이나 100권씩 읽는 이들도 분명 존재하겠지. 그러나 자신이 한 쓸데없는 짓을 남에게까지 강요하지 말기를 바란다. 세상은 정말 그런 식의 뻔뻔한 이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나는 계속 패배하기만 했다.
"모두가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합니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그들은 말한다.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것은 알고리즘적 사고방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화를 건다고 해보죠. 전화를 걸려고 스마트폰 전화번호부를 찾아보는데 필요한 전화번호는 저장되어 (1)있을 수도 있고 (2)없을 수도 있습니다. (1)과 (2)의 경우를 모두 생각하여 해결책을 고려해야 하죠. 예를 들자면 (1)의 경우 전화 걸기 버튼을 누르고, (2)의 경우 T전화 앱을 다운받은 후 원하는 번호를 찾은 후 전화 걸기 버튼을 누른다는 것입니다."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전, 나는 저런 한심한 식으로 전화를 걸지 않았고, 프로그래밍을 배운 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뻔뻔한 거짓말과 달리 내 생각하는 방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명백하다. 전화는 그냥 걸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은 그냥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법을 모른다면 그 말을 듣고 프로그래밍을 배울 생각조차 하지 못 할 텐데? 모순에 가득찬 발언이군. 누구나가 이미 생각하는 법을 안다. 정말 이런 한심한 걸 배우느라 쓴 내 시간이 아깝다.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과 친구가 되지 말고,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싸우지 마라." 이 말을 듣고 만화 삼국지를 세 번 읽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친구가 없고 (물론 어디서부터가 친구인지 좀 더 명확히 정의해야 하겠으나) 사람들은 자꾸만 내게 싸움을 걸어온다. 삼국지는 친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닌 걸까? 사람들이 자꾸 내게 싸움을 걸어우는 이유는 그들이 내가 만화 삼국지를 세 번이나 읽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까?
"고전을 읽으면 인간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삶에 대하여 고찰해보시기 바랍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예술적으로 완벽한 역작입니다." 이 말을 듣고 <바보 이반>을 읽었다. 손에 굳은살이 박힌 자들만이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내 오른손 중지 펜 잡는 곳에 분명 뼈가 튀어나와 있고 굳은살이 있고 오른손 안쪽 손목에도 마우스를 장시간 잡아서 생긴 굳은살이 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되는 걸까? 이 굳은살은 내가 머리가 빠개지도록 일했다는 증거가 되는 걸까?
왜 나는 "그런 걸 배우는 시간에 차라리 잠을 더 자겠어" 하며 그들을 무시하고 넘기지 못한 걸까? 그 말대로라면 나는 하루에 12시간씩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매일 12시간이나 잠을 자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반복해서 실험해본 결과 기껏해야 매일 10시간이 한계다. 그러나 꼭 잠을 잘 필요는 없다. 나에게 온갖 못된 짓을 한 새끼들을 떠올리며, 증오를 담아 그들에게 욕을 퍼부어대면 시간이 아주 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