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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사이클

계산 2020. 6. 30. 05:38

요즘은 아무 때나 자고 아무 때나 일어난다. 이게 다 내가 백수니까 가능한 일이다. 흔히들 이런 걸 두고 "자유로운 영혼" 이라고 말한다. 그래,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취업해봤자 사회가 만든 틀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살아갈 뿐이다.

 

영혼? 왜 영혼 이야기가 나오지? 부자유한 육체를 타고난 것이 인간으로서의 숙명이니 육체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별로 없기 때문. 그러나 무신론자인 나는 영혼같은 초자연 현상은 믿지 않는다. 나는 육체로 이루어져있고 그게 내 전부다. 내 육체가 시작한 순간 나는 시작했고 내 육체가 끝나는 순간 나는 끝난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체의 탄생과 사망은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이다. 탄생은 언제 일어나는가? 정자가 난자에 착상한 순간? 착상 후 14일이 지난 순간? 엄마 배 밖으로 나온 순간? 어느 지점을 특정하기 어렵다. 사망 역시 마찬가지다. 심장이 멈춘 순간? 심장에 타이밍 맞춰서 전기충격 및 물리충격을 잘 주면 다시 뜀. 동공반사가 정지한 순간? 더 이상 말에 반응하지 않게 된 순간? 아니면 시한부 진단을 받은 순간? 모든 인간이 기껏해야 100년도 안 되는 시한부 선고를 타고나는데?

 

하지만 법적/행정적으로는 특정 날짜를 생일/사망일로 정해야 한다. 행정편의적인 발상이죠. 그 정도 모형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대안 제시해보세요.

 

칸트는 스스로 정한 규칙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했다. 내가 아무 때나 자고 아무 때나 일어나는 건 아무런 규칙이 없는 혼돈에 지나지 않을 뿐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수면욕이라는 육체적 한계에 충실할 뿐이다. 이는 욕구의 노예일 뿐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해의 사이클에 맞게 진화해온 것이 지상의 생명체다. 생명체의 리듬은 24시간 주기로 흘러간다. 그러나 전등과 스마트폰과 마감일시로 가득한 현대사회는 그 주기를 방해한다. 나도 아무 때나 자고 아무 때나 일어나려고 하지만 잘 안 된다. 오늘도 오후 6시에 자서 오전 3시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실제로는 오후 1시에 자서 오후 5시에 일어났다.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나는 인간이 바로 노예다. 생체리듬의 노예다. 노예? 시간의 노예가 어쩌니 자본주의의 충실한 노예가 어쩌니 같은 말들을 하지만 그게 다 수사적 표현에 불과할 뿐 그래서 노예라서 뭐가문제? 나는 노예가 되고싶다. 나도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나는 생체주기의 충실한 노예가 되고싶다.

 

아빠가 이치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고통 뿐이라고.

 

무엇을 위해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나는 독단과 편견에 분노했다. 목적 잃은 추구에 분노했다.

 

"그 분노 자체가 사실은 자네가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네.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나는 것이 싫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네. 그러나 자네는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나고 싶었기에 자네는 그걸 시도했고, 그 시도가 좌절되었기에 분노하는 것 아닌가?"

 

잘 뜯어보면 논리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지만 왠지모르게 논리적으로 느껴진다. 논리란 무엇인가? 왜 위 문단은 논리적으로 느껴지는가? 논리적 엄밀함에 있어서 자연어에 기반한 비형식 논리에는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다. 형식논리만이 유일한 구세주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곳에도 구원은 없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논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 뿐이다. 흠 이거 좀 논리적이군, 이라는 느낌은 주의 신호다. 삐용삐용~ 위험! 위험! 상대가 지적 기교로 나를 해하려 한다는 주의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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