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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에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봤는데,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어요.

  •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
  • 대한민국 국민들은 태극기를 그릴 줄 알까?
  • 지나가던 행인들을 무작위로 뽑아서 태극기를 그리게 함
  • 태극 색 틀리고, 물결무늬 방향 틀리고, 괘 위치 틀리고, 제대로 그리는 사람이 없네
  • 올바르게 태극기를 그리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태극기를 바르게 그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뭔가 정말

  • 아 내가 한국인인데 태극기도 제대로 그릴 줄 모르네 ㅠㅠ 열심히 외워서 이제부터는 잘 그려야지 어디가서 쪽팔림 안당하게
  • 어휴 ㅉㅉ 국민수준 태극기도 못그리냐 그러고도 한국인이냐

자기가 태극기를 잘 그릴 줄 알았느냐 몰랐느냐에 따라 위 둘 중 하나를 택해 반응해야만 할 것만 같은 내용이네요.

제가 최근에 박물관에 다녀왔는데, 태극기의 역사적 변천 과정이 소개되어 있었어요. 구한말에 사용되었던 초기의 태극기는 현재와 같은 모양이 아니었어요. 태극무늬에서 음양의 뒤틀림? 섞임? 곡률? 이 훨씬 심하고, 괘 위치도 좀 달랐어요. 빨강 파랑 위치도 다르고. 역사적으로 사용되었던 태극기가 다 그런 부분에서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아마 별로 안 중요한 부분이라 조금씩 달라도 됐던 거 아닐까요? 태극기 만들던 사람들도 다 그거 헷갈려했어. 내가 왜 아무 의미도 없이 정확히 태극기 그리는 법을 알아야 해?

태극기에 들어가는 무극, 태극, 황극, 음양, 사괘, 팔괘, 육십사괘, 이런거 다 중국 고대철학에서 유래한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인데? 왜 국기에 중국냄새 나는게 들어가지? 소중화의 나라라서 어쩔 수 없었나? 하긴 뭐 꼭 태극기만 트집잡을 일은 아니네요. 한국을 대표하는 고등교육기관 서울대학교 로고는요?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 이라고 라틴어로 쓰여있는데? 우리나라는 로마가 아니라 대한민국인데??? 왜 한국어가 아니라 라틴어?????? 그리고 월계관? 횃불? 깃펜?????? 뭐지이건??????????? 월계수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라는데??????? 붓도 아니고 깃펜은 도데체 뭐지???? 모나미153 이 가장 한국적인 필기구아님?????? (비록 모나미(Mon ami)가 프랑스어이긴 하지만) 서울대학교는 월계관 횃불 깃펜 이런거 다 집어치우고 토끼귀모자 비상손전등 모나미153 으로 로고를 바꿔라. 라틴어도 집어치우고 한국어를 써라.

는 사실 모나미153 아무도 안쓰죠. 저는 맨날 uni 제트스트림만 씁니다. 제트스트림 다이스키! 어떻게 이렇게 펜이 잘 나올수가있지 ㄷㄷ

하긴 뭐 우리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우리 것인 것이죠. 마치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자가 정의이듯. 1더하기 1이 2인 이유는 1더하기 1이 2가 되도록 1과 2와 더하기를 정의했기 때문이듯. 옆 나라 일본을 보세요. 사람들 맨날 칸지(일본식 한자) 쓰고, 화풍 함박(일본식 함박스테이크) 먹고, 카레(일본식 카레) 먹고, 그렇게 잘 살고 있잖아요. 저희도 그렇게 살면 되죠 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요. 대한민국 국기에 중국이 들어가든 서울대학교 로고에 로마가 들어가든 그런 게 제 포인트가 아닌데. 그러나 저는 언제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되는 대로 글을 쓰죠.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태극기를 정확히 그리는 것, 안중근이 누구인지 아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걸 잘 못 해도 평소에는 사는 데 별로 지장이 없지만, 자기의 무지가 타인 앞에 드러나는 날에는, 이제 사는 데 좀 지장이 생기기 시작하죠. 연예인이 이런 걸 잘 못 해서 대중들한테 비난받는다던지... 뭐 그런 일이 종종 있잖아요.

뭔가 애국 관련된 예시만 주로 들었는데, 그게 이 글의 포인트는 아니고, 다른 예시도 많습니다.

  • 태극기 정확히 그리기 (사회)
  • 안중근이 누구인지 알기 (사회)
  • 맞춤법 잘 지키기 (국어)
  • 피타고라스 정리 (수학)
  • 근의 공식 (수학)
  • 곱셉은 덧셈보다 연산 우선순위가 높다 (2+2*2는 8이 아니라 6) (수학)
  • 0으로 나누면? (수학)
  • H20는 산소잖아 문과생인 나도안다 (과학)
  • 국민의 4대 의무는? (사회)
  • 유비가 누구? 관우가 누구? 장비가 누구? (사회)
  •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은? (사회)
  •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는? (사회)
  • 초대부터 지금까지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름을 나열하시오 (사회)
  • 이 영어 단어의 뜻은? (영어)
  • a/an, do/does 구분해서 쓰기 (영어)

이런 거 많습니다. 잘 못해도 평소에는 삶에 지장이 없지만, 무지가 타인 앞에 드러나면 비로소 지장이 생기는, 그런 것들이죠. 위 예시는 상대적으로 쉬운 것들인데, 사람에 따라 좀 더 어려운 것들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 원소기호 U의 의미는? 원소번호는? (과학)
  • 영단어 "salmon"의 발음은? "cupboard"의 발음은? (영어)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사회)
  • S^1 기본군은? (수학)
  • 언제 율/열을 쓰고 언제 률/렬을 쓰는가 (국어)

목록을 살펴보면 대체로 깊은 이해나 통찰보다는, 단편적 지식을 묻고있네요. 깊은 이해는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인 걸까요. 단편적 지식은 깊은 이해의 선결조건이니 (임진왜란의 발발 시기를 모르고 임진왜란의 의의를 논하기는 어렵겠죠 아마) 단편적 지식조차 없다면 깊은 이해 역시 없다고 봐도 문제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지성주의적 관점과 반지성주의적 관점이죠. "지성주의"라는 말이 있긴 한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반반지성주의" 라고 쓰느니 그냥 "지성주의" 라고 씁시다. 어차피 전통적 논리학에서 이중 부정은 곧 긍정이니 반반지성주의는 곧 지성주의입니다. 문제없어보이네요.

물론 저는 지성주의에 반대하고 반지성주의를 지지합니다. 이 글에서도 열심히 반지성주의가 옳은 이유를 설할 것이며 지성주의를 공격할 것입니다. 저는 참, 전부터 그랬던 것 같네요. 고대 그리스에서도 플라톤은 좀 띠겁던데, 소피스트들은 좋더라고요. 디씨에서도 정상적인 애들보다는 "빌런"들을 좋아했었죠.

플라톤은 정말 개좆같습니다. 뭐? 우리는 동굴 안에 묶여 평생 실제는 못 보고 횃불에 비친 그림자만 보면서 산다고? 그저 그림자일 뿐인 것을 전부라 믿으며 살고 있다고? 너같이 동굴 밖에서 진짜 태양빛을 본 애가 우리를 구원해줘야 한다고? 개 시발 오만한새끼. 저런 좆같은 새끼를 평생 동굴 안에 묶어두고 그림자만 보면서 살게 해야 진짜 동굴 안에 묶여 사는게 어떤 건줄 알지.

반면 소크라테스는 상대적으로 좋았던 것 같네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하긴 그렇죠. 제가 어디 아는 게 있겠습니까. 모든 게 그저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죠. 어휴 불쌍한 소크라테스. 그렇게 살다가 사형당했죠. 하지만 사형당할 때조차도 악법도 법이라느니 어쩌니 하면서 정신승리하면서 죽었죠. 마치 아Q같네요. 하긴 저는 아Q도 좋아했어요. 정신승리가 뭐 어때서? 육체로 승리해도 정신에서는 패배했다면, 그건 그냥 패배 아닐까요? 다른 모든 것에서 패배해도 정신에서는 승리했다면, 그건 모든 것에서 다 승리한 것 아닐까요? 정신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저도 지금 그렇게 정신승리하면서 살고있는건지 모르겠네요. 사실은 완전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아프리카 아이들보다 나으니 개쩌는 삶이라고 자위하고 있죠. 아니 근데 아프리카 아이들의 삶보다 나은건 객괜적 사실 아냐? 아닌가? 하긴 제가 뭐라고 그들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겠어요. 저도 정말 오만했네요.

얘기가 샜는데 하여튼 지성주의자들은 정말 좆같습니다. 안중근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정말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는군. 평소에는 자신을 숨기다가, 빈틈만 보이면 집단으로 튀어나와서 칼을 꽂아넣는 자객 같은 놈들. 모두에게 정확한 태극기를 요구해서 살림살이 좀 나아졌니?

그정도로 교육받았으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 그런 건 없어요. 네가 논하는 기본이란 그저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함이지. 인간을 지성으로 정렬해 계급을 나눠 차별하기 위함이지. "지성이 떨어지는 쟤는 본인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며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지성이 쩌는 걔는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같은 인간 차별주의가 네 사상의 핵심에 있지. 그렇게 모두가 지성을 위해 고군분투해서 얻는 것? 없다. 굳이 있다면 학력 인플레이션 정도. 취업 시장에 넘쳐나는 눈만 높아진 초과자격자들 정도.

한 지성주의자가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반지성주의도 그럴듯한 애가 해야 있어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반지성주의랍시고 기존 학문 다 부정하고 다니면 웃음만 나온다." 지성주의자들의 허영이 정말 잘 드러나는 발언이죠. 지성주의자들한테 중요한 건 주장 자체가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의 지적 수준이죠. 지성주의자분들, 님들은 지성주의자니까 지성 향상을 위해 항상 노력하고 계시겠죠. 그 노력의 목적이 뭡니까? 주장 자체가 아닌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지성을 통해 (그리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사회적 금전적 지위를 통해) 내 주장을 관철하고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정말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하나? 그냥 지성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인정을 공평하게 분배하면 그만인 것을.

열심히 지성주의를 공격해놓고,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지만, 고백을 하겠습니다. 어쩌면 반지성주의는 금욕주의같은 거 아닐까? 사실 술 마약 담배 섹스 도박 다 너무 하고싶어. 하지만 그것들은 나쁜 것이고 가치없는 것이니 하면 안 돼. 금욕을 통해서만 열반에 다다를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 진정한 행복이란 저런 말초적 쾌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야. 아 시발 그래도 술 마약 담배 섹스 도박에의 충동을 잠재우기가 너무 힘들어요 ㅠㅠ 언제나 술 마약 담배 섹스 도박만을 생각하며 살고있어요 ㅠㅠ

제가 지성주의를 비판했던 내용들, 사실 다 저한테 적용되는 말이에요. 저는 언제나 지성 및 사회적 지위 및 금전적 지위 등으로 인간의 급을 나눠서 판단하고 있습니다. 흠, 이 사람의 지성은 겨우 이정도군. 우월감이 느껴진다. 흠, 이 사람의 지성은 내 지성을 아득히 초과하는군. 열등감이 느껴진다. 흠, 이 사람은 안중근이 누군지도 모르는군. 병신안가????? ㅋㅋㅋㅋ 안중근이 누군지도 모르는게 말이되냐? ㅋㅋㅋㅋㅋㅋ 흠, 이 사람은 맞춤법이 엉망이군. 분명 미천한 지성이겠군. 맞춤법도 다틀리는 애가 뭘 한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한심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반지성주의자가 되고 싶어요. 뭘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차별주의자들의 PC를 공격할 때 말하죠. "PC는 이상론. 인간은 추악한 존재. PC의 꿈은 실현불가능." 같은 비판이 내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반지성주의 역시 일종의 좌파사상이자 일종의 PC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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