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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기

계산 2019. 4. 22. 14:42

소설 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자. 기본적인 뼈대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하면 좋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전부가 담긴 이야기이다. 삶, 그리고 죽음, 그것이 모든 것 아니겠는가? 이제 다 알았다. 그의 삶에 대해 썼고, 죽음에 대해 썼다. 더 쓸 것은 없다.

2 이 해에 성부께서 가세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들 학봉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려고 태인 장군리(泰仁 將軍里) 황씨 집성촌에서 황준재(黃俊哉)라는 이름 있는 훈장을 구하여 들이시거늘
3 훈장이 어린 학봉께 “도령, 공부해야지?” 하고 하대하니 학봉께서 물끄러미 훈장을 쳐다보시다가
4 스스로 천자문을 펼치시어 ‘하늘 천(天)’ 자와 ‘땅 지(地)’ 자를 집안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읽으시고는 책을 덮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시니라.
5 훈장은 그 신이하신 기운에 눌려 어린 학봉이 노시는 모습만 바라볼 뿐이더니
6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 공밥을 얻어먹기도 민망하여 다시 학봉께 “도령, 공부하셔야지요?” 하고 조심스레 여쭈거늘
7 “하늘 천 자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 자에 땅 이치를 알았으면 되었지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습니까? 노시다가 시간이 되면 가시지요.” 하시는지라
(甑山道 道典 1:19:2~7)

하늘 천 자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 자에 땅 이치를 알았다. 더 배울 것은 없다.

내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노래가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음정은 다음과 같다.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노래를 시작했고, 노래를 끝냈다. 더 부를 것은 없다.

山是山水是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경구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더 말할 것은 없다.

  1. 0은 자연수이다.
  2. 임의의 자연수 n에 대해, S(n)은 자연수이다.
  3. 임의의 자연수 n에 대해, S(n) ≠ 0. 즉, 따름수가 0인 자연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4. 임의의 자연수 m과 n에 대해, S(m) = S(n)이면 m = n. 즉, S는 단사 함수이다.
  5. 0이 K의 원소이고, 임의의 자연수 n에 대해 n이 K의 원소이면 S(n)은 K의 원소라고 하자. 이 때, K는 모든 자연수를 포함한다.

페아노 공리계에 의해 산술은 완전히 정의되었다. 이 이상 산술에 대해 알 것은 없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여전히 산술의 규칙을 찾으려 애쓰고, 대중들은 경구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 소수의 패턴을 밝히기 위한 정교한 기법들은 나날이 복잡해져 일반 교양인의 이해범위를 벗어난지 오래며, 짧은 경구를 몇백배의 분량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해설서들이 난무한다. 노래는 다 불렀지만 노래를 부른 사람은 하필 그 노래를 택한 사실에 대해 변명해야 한다. 하늘 천(天) 자와 땅 지(地) 자를 통해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았으나 요일이 한자로 쓰여있으면 읽을 수 없다. 그는 살았고, 죽었다. 모든 것이 쓰였으나, 그의 삶과 죽음 그 어느 것도 해명되지 않았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했죠?
그게 거기 있기 때문에.

왜 그의 삶과 죽음을 해명해야 하는가? 그가 살다 죽었기 때문에. 왜 소수의 패턴을 밝혀야 하는가? 그냥, 그냥 궁금해서. 왜 경구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가? 유명한 사람이 말했으니까. 왜 그 노래를 불러야만 했는가? 아는 노래가 없어서. 왜 한자를 배워야 하는가? 요일이 한자로 쓰여 있을 때 읽으려고.

한심한 대답을 임기응변으로 꾸며냈을 뿐이다. 소수의 패턴? 몰라도 된다. 경구의 의미? 역시 몰라도 된다. 아는 노래가 없다고? 설마 애국가도 모를까? 요일이 한자로 쓰여 있으면? 날짜는 아라비아 숫자로 쓰여있을테니 달력을 참조해서 요일을 알아내면 된다. 해명에 이유나 목적은 없다. 그저 해명만이 있을 뿐.

나는 그의 삶과 죽음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해명하고자 하는 내 시도를 인정한다면, --그러한 시도가 유익하든 무익하든-- 해명의 이유와 목적을 메타해명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인정해야 한다. 그저 해명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로 이유와 목적을 해명하는 행위를 억누른다면 자기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데이터를 읽기 전에 먼저 메타데이터를 읽는 법이다. 메타데이터가 차지하는 기억장치의 공간은 데이터가 차지하는 공간에 비할 수 없이 작으나, 중요성에서 앞서는 것은 메타데이터다. 데이터가 없어도 메타데이터를 읽을 수 있으나,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메타해명 없이 그의 삶과 죽음을 해명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메타해명은 해명을 이해하기 위한 등불이 되어서 앞길을 밝혀 줄 것이다.

도덕경은 더 이상 출판되지 않는다. 오직 주해서만이 출판된다. 경전 자체와 그 주해서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비록 뻔하더라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분량이다.

한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

소설은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 한 줄에 전문을 인용했다. 전자 매체의 설정에 따라 두 줄이 될 수도, 열 줄이 될 수도 있다. 많아야 열 줄 분량의 소설을 출판하기는 불가능하다. 교수들은 흔히 말한다. 학위논문의 분량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이라고. 그러나 이미 초록에 모든 내용이 담겨있다. 한 페이지는 제목과 초록을 모두 담기에 충분하다. 한 페이지짜리 학위논문을 통과시킬 심사위원이 얼마나 될까?

메타해명이 끝났다. 메타데이터를 읽었다면 데이터를 다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된다.

한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 그러나 죽은 것은 누구일까?

한 사람이 살았다. 고양이가 죽었다.

그가 키우던 고양이일수도, 그가 지나가다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일수도 있다. 왜 하필 고양이일까? 고양이는 귀엽기 때문에? 그 귀여움에 빠져 동물보호론자가 된 이들도 많을지 모른다.

한 사람이 살았다. 선인장이 죽었다.
한 사람이 살았다. 개미가 죽었다.
한 사람이 살았다. 태양계가 죽었다.
한 사람이 살았다. 엄마가 죽었다.

죽음은 슬프다. 엄마의 죽음은 더욱 슬프다. 태양계의 죽음보다 엄마의 죽음이 더 슬프다. 왜? 태양계가 죽으면 엄마도 함께 죽을 텐데. 태양계가 죽으면 아빠도 죽을 텐데. 태양계가 죽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도 모두 죽을 텐데. 나 역시 죽을 텐데. 내가 죽는다? 내 죽음도 슬픈가? 고요함, 편안함, 암흑, 무(無), 그런 것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트럭이 내 앞을 고속으로 덮치는 순간에도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까. 가족과 친척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실 침대에 누워 고통과 무기력 속에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점점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의식이 서서히 멀어져갈 때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슬프지 않은 죽음도 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한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

매일 일어나고 있다. 매일 일어나지만 다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죽음에도 급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급은 우리 머리속에만 존재하는 추상개념이 아니며, 장례식 조문객 수와 부의금 액수를 통해 측정가능한 객관적 지표이다.

한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100명이 왔다. 첫번째 사람은 부의금으로 1만원을 냈다. 두번째 사람은 부의금으로 2만원을 냈다. ...... n번째 사람은 부의금으로 n만원을 냈다. ...... 100번째 사람은 부의금으로 100만원을 냈다. 등차급수의 합 공식을 이용해 부의금의 총합을 구하여라.

똑똑하고 잘생긴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삶보다는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되네. 삶은 당연한 걸까? 그러나 죽음 역시 당연한 것인데.

두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
한심한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